텍스트(text)는 글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글자를 어떤 꼴과 크기로, 어디에 무엇과 함께 배치할지 전략적으로 결정하는 ‘디자인’의 과정이 반드시 수반된다. 디자인까지가 텍스트인 셈이다. 디자인은 텍스트를 숨기기도 하고 반대로 발견하게도 하는데, 이런 일은 특히 정치 영역에서 곧잘 발생한다. 길거리 현수막부터 선거 벽보까지 온갖 정치 텍스트로 둘러싸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텍스트에 내재한 디자인을 알아채고, 그것까지 함께 이해하는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다.
조현익(사진·34) ‘스튜디오 하프-보틀’(studio half-bottle) 대표는 ‘디자인의 정치 역량’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대표적 디자이너다. 10년 차 정의당 당원이자 마포구 지역위원회 운영위원인 그는 ‘디자인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10년째 작업 활동을 해왔다. 가장 잘 알려진 결과물은 ‘전국투표전도’. 일종의 선거 가이드북인데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거 △2021년 서울·부산시장 재보궐 선거 △2024년 총선거까지 4권째 발행해왔고, 오는 6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섯번째 책 출간을 앞두고 있다. 조 대표를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조 대표의 작품 중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전국투표전도’ 시리즈 외에도 정의당 후보의 선거 벽보를 제작하거나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과 협업하는 등 정치·사회 의제를 시각화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후보자 정면 사진 일색인 선거 벽보에 측면 사진을 넣고, 누리집 형태의 ‘여성혐오 타임라인’을 제작해 유구하면서도 빈번한 여성혐오를 아카이빙하는 등의 시도도 했다. 닷페이스부터 동아일보까지, 뜻만 맞는다면 신·구 언론과도 협업한다.
디자인은 정치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한때는 “있다”고 확신했지만, 이제는 확정적으로 답하지 않는다. “디자인은 보통 홍보를 위한 도구로 쓰이는데, 홍보할 가치가 없는 내용을 홍보해 달라고 의뢰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생각해요. 예쁜 그릇에 담겼을 때 더 빛을 발할 만한 내용으로 정치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요. 그런 측면에서 좋은 디자인이 좋은 정치를 견인하는 촉매 같은 역할을 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디자인이 새로운 정치로 안내했던 사례로는 지난 2018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신지예 후보의 벽보를 꼽았다. “신지예 후보의 무표정한, 누군가는 인상을 썼다고도 했던 그 표정은, 환하게 웃는 게 디폴트이던 선거 벽보의 공식을 전복시켰어요. 그러면서 새로운 정치 세력의 존재를 효과적으로 드러냈죠.”
더는 중립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세상은 망했는데 눈 떠보니 투표일?’. 제목부터 대놓고 주관을 내보였다. 반짝 이슈 위주의 선거판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흐름(외교, 노동 등)을 짚었고, 독자와 교감을 위해 분노를 표현하는 일러스트를 넣었다. 이런 흐름은 내달 발간되는 다섯번째 책에도 이어질 예정이다. 제목은 ‘윤석열들은 가라, 알맹이만 남아라’. “각 분야에 포진한 윤석열들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를 환기하려 해요. 내란 이슈에 가려질 테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이슈를 다시 짚는 거죠. 일종의 체크리스트처럼 보이도록 디자인적 장치를 넣을 겁니다. (…) 이번 선거에서는 2·3·4·5위가 여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헌정 무시 세력이 2위를 차지하느냐, 5위를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차기 정부의 향배에 영향을 줄 거라고 보거든요.” 이번 책 텀블벅은 오는 17일까지 진행된다.
“기존 정치 텍스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싶었어요.” 조 대표는 지난 2018년 전국투표전도를 처음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가장 통상적으로 쓰이던 시각물은 실측 지도에 최다 득표한 후보자 혹은 정당을 빨간색, 파란색으로 색칠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할 경우 “면적이 넓은 농어촌 지역의 색칠이 과도하게 커 보여 실제 결과를 왜곡”할 소지가 다분했다. 서울의 경우 좁은 면적에 많은 유권자가 밀집해 있는데, 이 방식으로 표현할 경우 서울의 투표 결과는 강원도 같은 넓은 지역에 비해 과소 표현될 수밖에 없어 정확하지 않았다. 막대그래프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지지하는 정의당 같은 군소 정당의 5% 미만의 득표율은 막대 그래프에서 얇은 실선 하나로 표현됐는데, 이런 방식은 군소정당 지지자의 존재를 더 미미하게 만들었다. 조 대표는 선거구 하나를 육각형 모형으로 바꾸고, 한자 점복(卜)자로 득표수를 표시해 보다 민주주의 작동 원리(유권자 1명의 표의 가치, 의원 1명의 의결권 가치)에 부합하도록 디자인적 요소를 개선했다. 더불어 과거 선거 결과 추이를 그래픽으로 만들고, 중앙 이슈에 소외되곤 했던 지역 이슈를 비중 있게 소개하는 등 디자인적·내용적으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이렇게 만든 ‘전국투표전도 2018’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목표액의 6배에 달하는 모금에 성공했고, 2020년·2021년 공직선거 때에도 같은 시리즈를 발간했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회사기념품 20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지난 2022년에 중단됐었다. “(각 정당의) 공천이 선거일에 임박해 이뤄지고 하니까, 책에 최신 정보를 담을 자신이 없었어요.” 제작자인 조 대표의 중립성을 의심하는 공격적 피드백도 있었다. “더는 할 필요가 없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2023년 한 북페어에 참석해 만난 독자로부터 “왜 더 안 내냐, 그런 책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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